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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간

예수님의 비밀

연중 제21주일 (가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마태오 16:20

오늘 복음의 이 구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직후에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반석’이며, 이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 철저히 비밀로 하라고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러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나가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알리기를 바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메시아의 비밀’이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구이신지에 관한 말이 가볍게 퍼져 나가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강력한 선물을 통하여 당신의 참된 정체를 발견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만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모든 말씀에 마음을 열며, 그리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믿음의 선물을 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시는 이러한 방식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 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뒤,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드러내 놓고 선포하도록 부름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 놓고 끊임없이 선포하도록 부름받았지만, 그분의 참모습은 여전히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이해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분을 선포하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그분의 거룩한 현존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당신이 누구이신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뿐이십니다.  베드로 성인이 고백했듯이, 그분께서는 유일한 메시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우리도 마음속에서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 이와 같은 깨달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 메시아를 향한 자신의 믿음과 그분에 대한 앎이 얼마나 깊은지 묵상해 보십시오.  온 힘을 다하여 그분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거룩한 현존을 드러내시도록 마음을 열어 드렸습니까?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예수님의 참모습에 담긴 ‘비밀’을 발견하고자 하십시오.  바로 그곳에서만 하느님의 아드님을 향한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메시아이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참으로 믿습니다! 저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어, 온 존재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주님, 주님 마음의 은밀한 깊은 곳으로 저를 초대하시고, 그곳에서 믿음 안에 주님과 함께 쉬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저희는 믿게 되었습니다

연중 제21주일 (나해)

이 때문에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믿어 왔고 또 확신합니다.”  요한 6:66-69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 가운데 가장 깊고 아름다운 가르침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받아들이기 벅찬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사도들, 특히 베드로의 아름다운 믿음도 드러내 줍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에 관한 아름답고도 매우 깊은 가르침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곧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하신 말씀을 굳게 지키십니다. 이어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로 향하시어, 방금 가르치신 내용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자유는 제자들이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압박하거나 조종하셨다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로 자유롭게 선택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억지로 믿게 하거나 믿도록 조종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가르침을 내어 주시며 우리를 믿음으로 초대하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드로는 깊은 신앙 고백을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다시 말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그 가르침이 어렵더라도, 주님을 따르는 일이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저희가 고통을 겪고 배척당하며 오해받아야 하더라도…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충만하고 깊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선택에 견줄 만한 다른 선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 말씀의 일부만 받아들이는 편이 더 낫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도 그분을 거부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베드로는 삶에서 참으로 좋은 선택은 오직 하나뿐임을 믿게 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그 선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는 것입니다. 삶의 그 무엇도 그리스도보다 앞세워 선택할 가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만이 선택할 가치가 있는 분이시라는 이 진리를 깨닫고자 힘써야 합니다.

오늘은 베드로의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며 메시아이자 구원자이십니다.  그분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지”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말씀을 되뇌며, 그 선택이 얼마나 많은 이의 지지를 받든, 다른 이들이 같은 선택을 하든 하지 않든, 그분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흐름에 휩쓸려 가면 잘못된 강줄기로 흘러가게 됩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면 단단한 땅 위에 서게 됩니다.

저의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 주님과 주님의 길 말고는 제가 갈 곳이 없나이다. 주님께서는 만물의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십니다. 저는 주님을 선택하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을 받아들이나이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좁은 문

연중 제21주일 (다해)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줍니까?  우리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천국에 가려고 애쓰겠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갈 수 없다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  그들은 죽은 뒤 주님을 만나 뵐 때, 자신이 그분 나라의 일원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랄 것입니다.

명확하면서도 다소 충격적인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 한발 물러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지금 걷고 있는 길을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이 실제로 겪게 될 일을 예수님께서 이처럼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눈을 열어 그분께서 바로 나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정직하게 성찰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때로는 진실을 마주하고, 그리스도보다 자신에게 더 의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인정하는 데 참된 겸손이 필요합니다.  “좁은 문”은 겸손한 이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교만과 자기 힘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우리 스스로 천국에 이르는 길을 만들려고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목자로서 언제나 우리를 부드럽게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때에만 그분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오직 하나뿐인 좁은 문을 통과하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게 될 순간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 만남은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께서 두 팔을 벌려 맞아 주시며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들어와 네 상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시는 만남일까요?  아니면 “나는 너를 모른다.” 하고 말씀하시는 만남일까요?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이신 우리 주님의 힘에만 의지하려고 애쓰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정직하게 마주할 때입니다.

주님, 저는 진정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나이다. 저를 천국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따르기로 선택하나이다. 저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살아가는 동안 겸손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사랑하는 주님,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며 모든 일에서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예수님의 공개적인 질책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마태오 23:13

마태오 복음서의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불행하여라, 너희…”라는 엄한 질책을 일곱 번 연이어 하십니다.  또한 그들을 “눈먼 인도자들”, “위선자들”, “회칠한 무덤들”, “뱀들”, “독사의 자식들”, “살인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종교 지도자들을 얼마나 단호하고 엄하게 질책하시는지 이보다 더 분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토록 엄하게 대하실까요?  그들이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중대한 악 가운데 하나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를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종교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그토록 강하게 꾸짖으시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단순히 회개하라는 초대 이상의 것이 필요하기에, 예수님의 엄한 꾸짖음은 그분께서 베푸시는 자비의 행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뒤틀린 악의가 무엇인지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볼 수 있도록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성을 잃은 분노나 증오로 이렇게 꾸짖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진리들이 그들의 마음 깊이 스며들어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질책들에서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묵상해 보십시오.  먼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독선의 추한 죄와 씨름하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겉으로는 신앙인답게 행동하면서도 정작 참된 자비를 베풀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때로는 다른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사랑에 찬 행동이 그를 질책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다만 이 점에 신중을 기하고, 어떤 질책이든 참으로 주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확인하십시오.  올바로 형성된 양심으로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식별했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이 이러한 죄에 빠진 사람을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는 가장 좋은 길일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독선과 교만이라는 끔찍한 죄에 빠질 때, 저를 겸손하게 하시고 제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꾸짖어 주소서.  이 거룩한 꾸짖음에 언제나 제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또한 자신에게 유익한 진리를 들어야 하는 이들에게 제가 사랑으로 그 진리를 전하도록 도와주소서.  모든 죄인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돕는 도구로 쓰일 수 있도록, 제 삶에 지혜와 용기와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먼저 속을 깨끗이 하여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마태오 23:25-26

예수님의 이처럼 직설적인 말씀은 매섭게 들릴 수 있지만, 참으로 자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이 회개하고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온 힘을 다해 도우시기에, 이 말씀은 자비의 말씀입니다.  첫머리의 “불행하여라”라는 말씀이 유독 눈에 들어올 수 있지만, 우리가 들어야 할 진정한 메시지는 “먼저 속을 깨끗이 하여라”입니다.

이 구절은 사람이 두 가지 상태 가운데 하나에 놓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첫째, 내면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깨끗하고 거룩해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어떻게 보이는지에는 몹시 신경을 썼지만, 내면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문제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은 내면을 깨끗이 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함을 드러냅니다.  내면이 깨끗해지면 그 결과로 겉도 깨끗해지고 빛나게 됩니다.  이 두 번째 상태에 있는 사람, 곧 먼저 내면이 깨끗해진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감화를 주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점은, 마음이 진정으로 깨끗해지고 정화되면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안에만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반드시 밖으로 빛나며, 다른 이들도 그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오늘, 내적 삶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밖으로 빛나고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다른 이들이 그 아름다움을 보고 있습니까?  마음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빛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도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들어야 할지 모릅니다.  또한 사랑과 자비에서 나오는 꾸지람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오시어 힘 있게 정화해 주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님, 부디 제 마음에 들어오시어 저를 온전히 깨끗하게 해 주소서.  저를 정화하시고, 그 순수함과 거룩함이 밖으로도 환히 빛나게 해 주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너희도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마태오 23:27-28

참으로 따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바리사이들에게 매우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질책하시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회칠한” 존재이자 “무덤”으로 묘사됩니다.  겉으로 거룩해 보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그들은 회칠한 존재입니다.  더러운 죄와 죽음이 그들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보다 더 직설적이고 준엄하게 그들을 꾸짖으실 수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지극히 정직한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말씀하시며 말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또한 거짓된 칭찬을 하시거나, 괜찮지 않은데도 모든 것이 괜찮은 척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온전히 정직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을 단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에서 배우고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기꺼이 그렇게 하려 합니까?  자기 영혼의 상태를 두고 자신과 하느님 앞에 정직해질 준비가 되어 있으며, 기꺼이 그렇게 하려 합니까?  문제는 우리가 흔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이 괜찮은 척하며 살아가고,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을 외면합니다.  그것은 보기에 아름답지 않고 인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영혼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그 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안에서 선함과 덕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죄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 정도는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렇더라도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면, 씻어 내야 할 더러움이 어느 정도는 보일 것입니다.

오늘, 얼마나 기꺼이 1) 자신의 삶에 있는 더러움과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2) 그것을 극복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하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 하고 외치실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지극히 진실하신 저의 주님, 날마다 제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도록 도와주소서.  주님께서 제 안에 길러 주신 좋은 덕들뿐 아니라, 제 죄로 말미암아 생긴 더러움도 보게 해 주소서.  주님을 더욱 온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그 죄에서 깨끗해지기를 힘써 바라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오 24:42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오늘이 우리 주님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려고 온갖 찬란함과 영광에 싸여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임을 안다면 어떻겠습니까?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겠습니까?  아마 우리 모두 그럴 것입니다.  아마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연락하여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고해성사를 본 다음, 하루를 기도하며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응답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로 오늘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가장 바람직한 응답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응답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아가고, 날마다 위의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깨어 있으면서” 주님께서 어느 순간에 다시 오시더라도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힘씁니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참으로 받아들여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오늘 다시 오시든, 내일 오시든, 내년에 오시든, 여러 해 뒤에 오시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어라”라는 이 부르심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영광스럽게 오시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은총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매일의 모든 순간도 가리킵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일으키는 모든 움직임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당신께 더 가까이 부르시며 끊임없이 건네시는 주님의 부드러운 속삭임을 가리킵니다.  

날마다 이러한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우리 삶에 더욱 온전히 들어오시려고 그분께서 찾으시는 무수한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최후의 승리 가운데 오실 날은 알지 못하지만, 날마다 매 순간이 그분께서 은총으로 오시는 때임은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주의를 기울이며, 경계하고 깨어 있으십시오!

모든 은총의 주님, 주님의 목소리를 찾고 제 삶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마음을 기울이도록 도와주소서.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늘 깨어 준비하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애덕의 기름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오 25:11b-12

참으로 두렵고도 정신이 번쩍 드는 경험일 것입니다.  이 구절은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옵니다.  그들 가운데 다섯은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나머지 다섯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오셨을 때,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등잔에 쓸 기름을 더 구하러 나가 있었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잔칫집 문이 이미 잠겨 있었습니다.  위의 구절은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깨어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확실히 준비를 갖출 수 있겠습니까?  등잔에 쓸 “기름”이 넉넉히 있을 때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기름은 특별히 우리 삶의 애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묵상할 질문은 간단합니다. “내 삶에는 애덕이 있는가?”

애덕은 단순한 인간적 사랑 그 이상입니다.  여기서 “인간적 사랑”이란 감정이나 느낌, 끌림 등을 뜻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어떤 활동, 또는 삶의 여러 가지 것에 대해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운동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것 등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덕은 이보다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애덕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운 마음을 우리 마음 안에 심어 주시어,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애덕은 우리 자신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돌볼 수 있게 해 주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애덕은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활동이며, 우리가 하늘 나라의 잔치에 환영받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자신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힘겨울 때에도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도록 이끄시며 자신의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삶에서 거룩함을 키워 가도록 돕는 말과 행동을 합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또 여러분을 통하여 활동하시며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십니까?  이 질문들에 “예”라고 답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삶 안에는 분명 사랑이 살아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주님, 제 마음이 주님의 거룩한 마음을 모시기에 합당한 거처가 되게 해 주소서.  제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 고동치게 하시고, 제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을 향한 주님의 완전한 돌보심에 동참하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오 25:23

이 이야기는 두 가지를 다룹니다.  첫째,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들며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그 충실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둘째, 이 지상에서뿐 아니라 마침내 죽음을 맞아 예수님을 뵙게 될 때에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충실히 응답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해 주신다면 얼마나 큰 복이겠습니까?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오늘 죽음을 맞이한다면, 주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자비로이 위의 말씀을 해 주시리라는 확신이 곧바로 들지 않는다면, 오늘은 삶에 변화를 주기에 좋은 날입니다.

예수님과의 영광스러운 만남을 의식적으로 준비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좋은 영적 실천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삶에서 어떤 “책임”을 맡기셨으며, 그 책임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받은 모든 은사를 복음에 봉사하고 애덕을 널리 전하는 데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하느님과 그분의 거룩한 뜻에 자신을 바치는 데 부지런합니까?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망설여진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바치기를 바라실 수도 있다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을 희생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세속적인 만족을 찾으려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왜 그럴까요? 왜 지금 여기에서 순간적이고 피상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영원한 기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일까요?

오늘, 삶에서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를 묵상해 보십시오. 그 목표는 이 삶에서 다음 삶으로 건너갈 때 주님과 영광스럽게 만날 준비를 온전히 갖추는 것입니다. 지금은 천국이 다소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뵙는 때가 오면 조금도 막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순간, 이 지상에서 살아온 삶의 모든 세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왔는지, 아니면 하루하루 충실하지 못했는지가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거나 영원한 후회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과 주님의 거룩하신 뜻에 눈길을 고정하도록 도와주소서. 삶에서 이기적이고 순간적인 목표에 매이지 않게 하시어, 오직 주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방식으로 주님을 섬기려 힘쓰게 하소서. 천국을 바라보며 주님과의 영원한 만남을 날마다 준비하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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