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영적 생명의 문)(피렌체 공의회: DS 1314: 영적 생명의 문)이자, 다른 성사들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13)
‘세례’라는 말은 ‘물에 잠그다’ 또는 ‘담그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물에 잠기는 일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실제로 세례받는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킵니다. 그 사람은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인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세례는 바로 이 새로운 탄생입니다. 이것은 그저 상징적이거나 감동을 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 실제로 새롭게 태어나는 일입니다. 이 새로운 탄생의 결과로 새사람이 나타납니다. 옛사람은 세례의 물속으로 들어가 죽습니다. 그런 다음 새사람이 그 물에서 일어납니다. 이러한 까닭에 세례의 이상적인 형태는 온몸을 물에 잠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듯이, 세례받는 사람도 온전히 물속에 잠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듯이, 새롭게 창조된 그리스도인도 그 물에서 일어납니다.
세례의 효과
세례에 물을 사용한다는 것은 참된 정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죄와 죽음을 씻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성사이므로, 자신이 나타내는 바를 실제로 이루어 냅니다. 다시 말해, 실제로 모든 죄와 죽음을 씻어 냅니다.
원죄: 무엇보다 먼저, 세례는 원죄를 씻어 줍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될 때 원죄의 상태로 잉태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100%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태로 잉태되어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인간 본성은 꼭 필요한 도움 없이는 행복에 이를 수 없을 만큼 상처 입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꼭 필요한 선물 없이는 천국에 이르거나 하느님과 일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은총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선물입니다.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죄와 죽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죄 속에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죽음 자체를 무너뜨리시고 생명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어야 할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얻으신 은총을 우리에게 어떻게 전해 주십니까? 타락한 우리의 인간 본성에 베풀어 주신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습니까? 그 답은 무엇보다도 세례성사입니다!
세례는 우리 삶에서 참으로 은총을 주는 첫 번째 행위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은총의 삶으로 들어가 교회의 지체가 되고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문입니다. 세례의 물이 우리 위에 부어질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변화됩니다.
본죄: 성인이 세례를 받으면, 세례는 그 사람이 지은 모든 본죄도 씻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나이, 곧 이성을 사용할 나이에 이른 사람들은 원죄뿐 아니라 본죄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가 가져오는 변화는 매우 철저하고 온전하기에, 성인이 세례를 받으면 그가 지은 본죄 하나하나가 모두 씻겨 나갑니다. 초기 교회에는 죽기 직전에 이 성사로 모든 죄를 씻으려고 나이가 들 때까지 세례받기를 미루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관행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계속 베풀어진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지만, 모든 본죄가 씻긴다는 점을 잘 보여 줍니다. 굴곡 많은 과거를 뒤로하고 세례를 받는 성인들에게 이는 흔히 매우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세례를 받으면 자신의 모든 죄가 사라지기에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지워지지 않는 영적 표지: 세례는 또한 우리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영적 표지’라고 부르는 인호를 새겨 줍니다. 우리는 소유주를 나타내는 낙인이 찍힌 동물과도 같습니다. 몸에 찍힌 그 표지는 그 동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영구히 나타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 때 우리의 영혼에는 영구적인 영적 표지가 새겨져, 우리가 영원히 하느님의 자녀로 남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심각한 죄를 짓더라도, 이 표지는 언제나 은총의 원천으로 남아 우리를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부릅니다.
하느님의 자녀: 세례는 우리를 하느님의 양자로 삼아 그분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삼위일체의 새로운 가족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성령으로 가득 차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됩니다. 이를 이루는 것은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므로, 그 결과 우리는 저절로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을 바라보실 때, 우리도 아드님 몸의 지체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형제자매: 하느님께서 저의 아버지이시고 여러분의 아버지이시라면, 우리는 새로운 영적 가족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 계신 같은 아버지를 모시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입니다. 이처럼 세례는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영적 일치와 영적 가족의 유대를 이루어 줍니다. 한 번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언제나 이 은총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는 자녀처럼 되더라도, 우리 아버지께서는 은총으로 우리를 당신의 가족 안에 다시 맞아들이시려고 언제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구약 성경의 예표들
세례는 태초부터 가려진 모습으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젠가 물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사실은,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신 여러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그 방식들을 살펴봅시다.
창조: 창세기의 두 번째 문장에는 “거센 바람이 물 위를 휩쓸고 있었다”(창세 1:2)고 나옵니다. 이는 성령께서 창조의 물 위에 숨을 불어넣으시어 그 물이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원천이 되게 하셨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세례의 표상입니다.
노아: 하느님께서는 먼저 죄로 물든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기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례의 표징이었습니다. 물이 땅을 뒤덮어 모든 것을 멸망시켰듯이, 세례도 우리를 덮어 죄를 없애 줍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새로운 인류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례의 물로 씻겼기에 그 새로운 인류의 일원이 됩니다.
홍해: 홍해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세례의 표징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바닷물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구원받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이 물을 건너가는 동안 그들 뒤에서는 악이 멸망하는데, 파라오의 군대가 물에 뒤덮이는 것이 이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그 물을 통하여 자유로 나아갑니다.
요르단강: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의 마지막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강의 물을 건넜습니다. 그 강은 물살이 거셌습니다. 그러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물에 들어서자마자 강물이 흐르기를 멈추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세례가 우리 삶에서 은총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임을 가리킵니다.
이 성사를 우리에게 주심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세례성사가 우리 앞에 곧바로 드러났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오심을 맞이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요한은 처음에는 사양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요르단강에 들어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이 세례가 필요했을까요? 회개가 필요하셨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세례 때 하신 일은 ‘거꾸로 된 세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물에 들어가시어 친히 그 물에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물에 들어가심으로써 모든 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 물에 당신의 은총을 전해 주시어, 그때부터 물이 다른 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도구로 쓰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달리 세례를 통하여 변화되지는 않으셨지만, 그 세례는 공생활의 시작이자 당신께서 누구이신지를 처음으로 드러내신 사건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내려오셨고, 성부께서는 하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시며, 구원이라는 신적 사명을 완수하시도록 성부께 파견되시고 성령의 힘을 받으신 분이심을 드러내는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세례를 성사로 정식 제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19). 이 명령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뜻하신, 은총으로 들어가는 영광스러운 관문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세례를 베푸나요?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세례를 맡기셨습니다. 그들에게 가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임무를 수행할 책임은 무엇보다도 주교와 사제들에게 있습니다. 부제들도 성품성사에 참여하므로 세례의 정규 집전자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구원에 필요하며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에, 누구나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기가 태어났는데, 의사가 그 아기가 몇 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때 부모 중 한 사람이 물을 가져와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세례는 다음 세 가지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1) 아기의 머리에 물을 붓습니다. 2)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합니다. 3) 교회가 뜻하는 대로 세례를 베풀려는 지향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물과 말씀과 지향이 모두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 아기는 의사나 간호사에게도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예를 들어 그 의사나 간호사가 유다교 신자이거나 무신론자라 해도 가능합니다.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위의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기만 하면, 아기는 참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으려는 이가 이성을 사용할 나이에 이르렀다면, 추가로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유아는 부모만이 그들을 교회의 신앙 안에서 기르려는 지향을 가지고 있으면 세례를 받지만, 이성을 사용할 나이에 이른 이들은 스스로 세례를 원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아이가 어른이 된 다음 자유롭게 세례를 선택하는 것이 더 좋을까요, 아니면 어릴 때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더 좋을까요? 물론 우리 교회는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어릴 때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이가 자란 뒤에 자신의 신앙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해야 하므로 어릴 때 세례를 받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합니다. 아이들은 세례도 그리스도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전통이 있습니다. 아이가 신앙 안에서 자라는 것이 더 좋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이는 아이들이 자라고 성숙해 가면서 그리스도를 선택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며, 평생에 걸쳐 이 본질적인 선택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은총을 그들에게 베풀어 줍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라고 성숙해 가면서 여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스스로 선택해야 하지만, 유아 세례는 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두 살짜리 아이에게도 옳고 그름을 배우기 시작하려면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줍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은 어떠하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세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은 또 어떠할까요? 그들은 멸망할 운명일까요?
이러한 물음들은 모든 일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과 지혜를 이해할 때에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주의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을 떠난 아이를 보시고 “글쎄, 미안하지만 나는 세례받은 아이들만 하늘 나라에 받아들인단다.” 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지혜에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례가 구원으로 이끄는 길 가운데 우리가 아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서로 대립하는 듯한 이 두 관점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곧, 사랑이신 하느님과 구원에 세례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은 그리 어렵지 않게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가 구원의 은총을 받는 길 가운데 우리가 아는 유일한 길,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지니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 주신 계시의 한계에 제약되거나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사에 매여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세례받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면, 부모는 하느님께서 자신들보다 훨씬 더 그 아이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안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완전한 사랑으로 행동하실 것입니다. 한 가지 추측은 하느님께서 천사들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선택의 기회를 그 아이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에게는 단 한 번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이 아이가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마주할 때, 자유롭게 하느님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여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살도록 초대받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자유로운 선택이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라 하더라도 자기 뜻에 반하여 그곳에 있도록 강요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해 볼 만한 또 다른 경우는 세례받지 않은 어른의 경우입니다. 그 어른이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 역시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경우에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혈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받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이 성사를 받기 전에 신앙 때문에 순교하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경우를 그리 자주 보지 못하지만, 초대 교회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는 세례받으려는 이러한 열망과 순교 행위가 물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세례의 은총을 얻게 하여, 그 사람이 통상적인 세례의 모든 은총과 효력을 받게 된다고 믿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화세’에 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믿음을 지니고 세례를 받기를 바라지만 물로 세례를 받기 전에 죽는 이들이 포함됩니다. 세례를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열망이 회개와 사랑에 결합되어,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사를 받지 못하더라도 구원의 은총을 가져다줍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죽은 아이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아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다정한 사랑은 우리가 그들의 구원을 희망할 근거가 됩니다. 자녀가 세례받기를 바랐던 부모들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에 의탁하며 이 희망 안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례받기로 선택하지 않아 이 성사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이들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두 범주 가운데 하나에 속합니다. 첫째로, 자신의 탓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인 믿음에 이르지 못하여 세례를 청하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 하느님께서는 오직 마음만을 보시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탓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인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복음이 한 번도 선포된 적 없는 문화 속에서 살며 실제로 예수님에 관해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해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는 이유로 영원한 멸망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예수님에 관해 듣기는 했지만 위선으로 가득한 메시지만 접한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선포된 메시지가 줄곧 왜곡되어 있었고 악의적이었다고 해 봅시다. 어쩌면 그 선포자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고, 예수님에 관해 듣던 사람은 이 전달자 때문에 명시적으로 선포된 복음의 메시지를 거부했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복음의 메시지가 매우 그릇된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경우 메시지를 거부한 것은 실제로는 전달자의 위선을 거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하느님께서 마음을 아시고, 그 마음속의 의향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인 믿음에 이르지 못하여 세례성사도 명시적인 방식으로 받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오직 마음만을 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들여다보실 때 선함과 믿음을 보신다면, 그럼에도 당신의 은총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도 누구의 목소리인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양심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알아보실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끝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자신의 탓으로 세례받지 않은 사람의 경우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모든 기회가 주어지고, 다른 이들이 보여 주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다운 증거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자유 의지로 마음속에서 이를 거부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자유 의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직 하느님만이 마음을 아시며, 오직 하느님만이 그 사람의 마음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 마음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한 완고함을 보신다면, 이 사람에게는 죄책이 있으며 영원한 구원의 제안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슬픈 일입니다.
세례성사의 거행
세례성사는 수 세기에 걸쳐 발전해 온 정해진 전례 예식에 따라 거행됩니다. 이를 자세히 설명하려면 그 자체로 책 한 권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 전례 예식의 핵심적인 부분 몇 가지만 살펴보고, 그 상징과 의미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묵상은 「유아 세례 예식」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상징과 의미는 세례받는 어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성당 입구에서 시작: 세례 예식은 성당 입구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지금 이루어지는 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세례를 받는 아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교회 안에 환영받습니다. 성당 건물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받을 이를 입구에서 맞이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으로 환영하는 것입니다.
십자 표시를 함: 이어서 집전자와 부모, 대부모가 세례받을 이의 이마에 십자 표시를 합니다. 이 상징적인 행위는 곧 이루어질 일을 드러냅니다. 아이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영혼에 새겨 주시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 인호를 받게 됩니다.
성경 봉독: 하느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강론을 합니다. 이는 믿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응답은 무엇보다도 세례입니다.
예비 신자 성유를 바름: 아이를 위하여 악을 물리치는 기도(구마 기도)를 바친 다음, 주교가 미리 축복한 성유를 아이에게 바릅니다. 이 기도는 우리 세상에 악이 실재함을 인정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시작하는 아이에게 보호의 은총을 베풀어 줍니다. 이어서 아이의 가슴에 성유를 바르는데, 이는 자신을 지켜 줄 흉갑을 받는다는 표징입니다.
세례수 축복: 집전자는 세례대로 가서 물을 축복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사용되는 기도 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기도는 하느님께서 물을 통하여 이루신 일들의 역사를 되새기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이 장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다음 사건들을 되새깁니다. 곧 창조 때 성령께서 물 위에 숨을 불어넣으신 일, 노아 이야기, 홍해, 요르단강,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죄를 끊어 버림과 신앙 고백: 부모와 대부모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요청받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가 곧 세례를 받게 될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 신앙 고백을 통하여 부모와 대부모는 자신들이 고백하는 이 신앙 안에서 아이를 기르겠다고 약속합니다.
세례 예식: 세례의 핵심적인 부분은 물을 붓거나 뿌리거나 물에 잠그는 것입니다. 물이 세례받는 이의 몸에 닿는 동안 삼위일체의 정식을 말합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집전자는 또한 교회가 하고자 하는 일, 곧 세례를 베풀려는 지향을 지녀야 합니다.
축성 성유: 축성 성유는 기름과 향료를 섞어 만듭니다. 주교는 성주간에 성유 축성 미사라고 하는 특별한 미사에서 이 성유를 축성합니다. 이 성유는 견진성사와 성품성사에도 사용됩니다. 기름은 성령의 도유를 상징하고, 향료는 세례받은 이들의 삶에 언제나 스며들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감미로운 향기를 상징합니다.
세례복: 아이에게 흰옷을 입히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순결과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촛불: 이어서 부모와 대부모는 불이 켜진 초를 받습니다. 이 초는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하는 부활초에서 불을 붙입니다. 부모와 대부모에게 빛을 맡기는 것은, 세례 때 받은 믿음이 언젠가 천국에서 완성에 이르도록 이제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 아이의 마음속에 이 신앙의 빛을 꺼지지 않게 지켜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부모를 위한 축복: 예식은 부모를 위한 특별한 축복으로 마칩니다. 이 축복은 세례받은 자녀를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고 교육하는 데 부모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부모는 오직 하느님의 도움으로만 이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다음: 제4장 – 견진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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