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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 영혼의 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저는 이미 충분히 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수녀님께서는 제 수도 생활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시는군요.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저만큼이나 잘 알고 계시는 일들을 수녀님께 말씀드려야 한다니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순명하겠습니다. 저는 이 원고가 누구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지 묻지 않겠습니다. 수녀님께서 읽어 보지도 않으신 채 제 눈앞에서 이 원고를 불태우신다 해도, 저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리라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공동체 안에는 제가 수도원에 들어온 이래 원장 수녀님께서 늘 제 응석을 받아 주셨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마음을 보십니다.”[1]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저를 엄하게 대해 주신 데 대하여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작은 꽃에게 생명을 주는 굴욕의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꽃은 너무나 연약하여 그 물 없이는 뿌리를 내릴 수 없었으니, 이토록 큰 은혜를 입은 것은 원장 수녀님 덕분입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주님께서는 당신의 작은 꽃을 가꾸시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이제 물을 충분히 주었다고 여기셨는지, 찬란한 햇살의 따스한 빛 아래에서 꽃이 피어나도록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꽃을 보며 미소 지으시고,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이 은혜 또한 수녀님을 통하여 옵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작은 꽃에게 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놀랍게 자라나게 합니다. 작은 꽃은 마음 깊은 곳에 그 귀한 이슬방울들, 곧 지난날의 극기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며, 그 이슬방울들은 꽃에게 자신이 작고 연약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설령 모든 피조물이 다가와 감탄하며 치켜세운다 하더라도, 하느님 눈에는 자신이 가련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을 때 솟아나는 참된 기쁨에 헛된 자만을 조금도 더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제가 칭찬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수녀님께서 제게 보여 주시는 사랑과 신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그 사랑과 신뢰에 깊이 감동합니다. 다만 이제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며, 제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하느님께 돌리기에 흔들림 없이 그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실제보다 더 나아 보이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얼마나 여러 가지 길로 영혼들을 이끄시는지요!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자신을 기억하게 할 아주 작은 것 하나도, 심지어 글 한 줄조차 남기지 않은 성인들에 관하여 읽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처럼 숭고한 가르침으로 교회를 풍요롭게 하고, 하느님께서 더욱 널리 알려지고 더욱 큰 사랑을 받으시도록 “임금님의 비밀”[2]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은 성인들도 있습니다.

이 두 길 가운데 어느 길이 우리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해 드릴까요? 제가 보기에는 두 길 모두 똑같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은 모두 성령의 영감을 따랐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언자들에게 “의인에게 모든 일이 잘된다고 말하여라.”[3] 하고 기록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만을 찾을 때에는 모든 일이 잘됩니다. 그러므로 가련한 작은 꽃인 저도, 이 지상에서 예수님을 대신하시는 원장 수녀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 애쓸 때 저의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원장 수녀님께서도 아시듯이, 저는 언제나 성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성인들과 저 자신을 견주어 볼 때면, 행인들의 발에 밟히는 모래 한 알이 구름 속에 봉우리가 묻힌 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듯이 저도 성인들에게서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늘 느꼈습니다.

저는 낙담하는 대신, 하느님께서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지는 않으실 것이며, 따라서 제가 비록 작더라도 성덕을 열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큰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저 자신과 저의 수많은 불완전함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작은 길로 하늘 나라에 이르는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아주 짧고 곧은 길, 완전히 새로운 작은 길을 말입니다. 우리는 발명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부자들은 힘들여 계단을 오를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승강기를 이용하니까요. 저도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 줄 승강기를 찾아보려 합니다. 저는 너무나 작아서 완덕의 가파른 계단을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 승강기가 무엇인지 알려 줄 실마리를 성경에서 찾으려 애쓰다가, 영원한 지혜께서 친히 하신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누구든지 작은 이는 나에게 와라.”[4] 그때 저는 찾던 것을 발견했다는 확신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작은 이에게 무엇을 해 주실지 더 알고 싶어서 계속 찾아보았고, 마침내 이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너희는 품에 안기고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자식을 어루만지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5]

이보다 더 다정하고 감미로운 말씀으로 위로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오, 예수님, 그렇다면 저를 하늘 나라에까지 들어 올려 줄 승강기는 바로 주님의 두 팔입니다. 그곳에 이르기 위하여 저는 커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작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하며,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오, 저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제 기대를 넘어서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 . .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오리다! 주님, 당신께서는 어릴 적부터 저를 가르치셨고, 저는 이제껏 당신의 놀라운 업적을 전하여 왔으니, 늙어 백발이 되어서도 그리하오리다.”[6]

제게 이 노년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지금이든 훗날이든 다를 바 없을 듯합니다. 주님 눈에는 이천 년도 이십 년보다 길지 않고…… 단 하루보다도 길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수녀님의 이 자녀가 수녀님을 떠나고 싶어 안달하거나, 인생의 저녁보다 아침에 죽는 것을 더 큰 은총으로 여긴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자녀가 참으로 소중히 여기며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어 이 자녀를 하늘의 당신 집으로 이끄시는 듯하니, 이 자녀는 기쁩니다. 하느님께서 지상에서 선을 행하시는 데에는 아무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다른 이들보다 이 자녀는 더욱더 필요하지 않으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저는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제가 수녀님 곁에서 감미롭고도 쉬운 일을 해 나가기를 바라시며,[7] 저는 그 일을 하늘에서 완수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성인에게 하셨듯이 수녀님께서는 제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너무나 작게 느껴지기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는 수녀님께서 몸소 어린양들을 돌보시고 저도 그들 가운데 있게 해 주십사 간청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저의 이 합당한 소원을 일부 들어주시어 저를 그들의 스승이라기보다 동무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풀이 무성하고 그늘진 목초지로 이끌고, 가장 맛있고 좋은 풀이 어디 있는지 가리켜 주며, 화려하지만 독이 있는 꽃들을 조심하라고 일러 주라 하셨습니다. 그런 꽃들은 발로 짓밟을 때 말고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어찌하여 저의 어린 나이와 부족한 경험이 수녀님께 걱정이 되지 않았을까요? 제가 수녀님의 어린양들을 멀리 엇나가게 할까 두렵지 않으신가요? 그렇게 하신 것은 아마도 주님께서 작은 이들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흔히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셨기 때문이겠지요.

이 땅에서 자신의 좁은 생각을 잣대로 하느님의 전능을 가늠하지 않는 영혼을 만나기란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세상은 이 지상의 어느 곳에서든 언제나 예외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만은 이러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나이로 경험을 헤아리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거룩한 다윗 임금도 젊은 시절 주님께 “저는 어리고 멸시를 받습니다.”[8] 하고 노래하였으니까요. 그러나 같은 시편에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당신의 계명들을 찾았기에 노인들보다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저는 당신의 의로운 법규들을 지키기로 맹세하였고 또 굳게 결심하였습니다.”[9]

또한 수녀님께서는 어느 날, 거룩하신 스승께서 제 영혼을 비추시고 오랜 세월에 걸쳐 얻을 만한 경험을 제게 주셨다고 확언하시면서도, 그것이 경솔하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저는 허영의 죄를 지을 수 없을 만큼 작습니다. 또한 그럴듯한 말로 제 겸손을 증명하려 애쓰기에도 너무나 작습니다. 저는 그저 소박하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10]고 인정하는 편이 더 좋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일은 제가 얼마나 작은지, 또 어떤 선한 일도 할 능력이 제게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제 영혼은 여러 가지 시련을 겪었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슬픔 속에서 고통을 겪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에서 감미로움을 발견합니다. 저를 속속들이 아시는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든 이 글을 읽으며 미소 지을 것입니다. 제 영혼보다 시련을 덜 겪은 듯 보이는 영혼이 또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지난 일 년 동안 제가 견디어 온 순교의 고통이 알려진다면 모두가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수녀님께서 바라시니 그 고통을 묘사해 보려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참으로 설명할 말은 없습니다. 말은 언제나 실제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해 사순 시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몸 상태가 훨씬 좋았고, 단식을 엄격하게 지켰는데도 성주간까지 줄곧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성금요일 이른 새벽, 예수님께서는 제가 곧 당신의 아름다운 집에서 당신과 함께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 기억은 얼마나 감미로운지요!

저는 목요일 밤 내내 수난 감실 곁에 머물며 깨어 있을 허락을 받지 못하여 자정에 제 수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베개에 머리를 댄 지 얼마 되지 않아 뜨거운 것이 입술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곧 죽으리라 생각했고, 기쁨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등불을 꺼 버린 뒤였기에, 아침까지 궁금증을 억누르며 평화롭게 잠들었습니다. 일어날 시간인 다섯 시가 되자, 확인해야 할 기쁜 소식이 있다는 생각이 곧바로 떠올랐습니다. 창가로 가 보니 예상했던 대로 손수건이 피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제 희망은 얼마나 컸는지요! 저는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바로 이날, 제가 사랑하는 그분께서 당신의 첫 부르심을 제게 들려주셨다고 굳게 확신했습니다. 그 부르심은 멀리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속삭임처럼, 그분께서 기쁘게 다가오심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일시경과 공동체 모임에 더없이 열심히 참여한 뒤, 서둘러 원장 수녀님 무릎 앞에 엎드려 제 행복을 털어놓았습니다. 통증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사순 시기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끝마쳐도 좋다는 허락을 쉽게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날 성금요일에는 조금도 완화하지 않고 가르멜의 모든 고행에 동참했습니다. 이 고행들이 그토록 감미롭게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희망에 저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행복했던 날 저녁에도 여전히 기쁨에 가득 차 수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잠들려는데, 사랑하올 예수님께서는 제가 머지않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리라는 표징을 전날 밤과 똑같이 주셨습니다. 저는 너무도 또렷하고 생생한 믿음을 느꼈기에, 하늘 나라를 생각하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믿음이 전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고, 다른 세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은 실상 자기 마음속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빛으로 충만한 파스카 시기에 주님께서는, 은총을 남용하여 순수하고 영속하는 기쁨의 유일한 원천인 믿음과 희망이라는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영혼들이 참으로 있음을 제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이 어둠에 짓눌리도록 허락하셨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저를 위로해 주던 천국에 대한 생각은 이제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시련은 단지 며칠이나 몇 주 동안만 이어진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 달째 고통을 겪고 있으며, 아직도 여기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것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 본 사람만이 그 칠흑 같은 어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의 아름다움도 단 한 줄기 햇빛도 본 적이 없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다만 아주 어릴 때부터 그 경이로운 것들에 관해 들어 왔고, 제가 사는 나라가 참된 고향이 아니라는 것, 언제나 그리워하며 기다려야 할 다른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것은 안개의 나라에 사는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한 진실입니다. 햇빛 찬란한 그 나라의 임금님께서 어둠의 나라에 33년 동안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어둠은 그분께서 세상의 빛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_[11]

그러나 사랑하는 주님, 당신의 이 자녀는 당신께서 신성한 빛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이 자녀는 믿지 않는 형제들을 위하여 당신께 용서를 청하며, 당신께서 원하시는 동안에는 언제까지나 슬픔의 빵을 먹고자 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가련한 죄인들이 음식을 먹는 쓰라림의 식탁에 함께 앉아, 당신께서 신호를 주실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자녀가 자신과 죄를 지은 형제들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씀드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오, 하느님! 저희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2] 저희를 의롭게 하시어 돌려보내 주십시오. 믿음의 빛을 받지 못하는 모든 이가 마침내 그 빛을 보게 해 주십시오! 오, 저의 하느님, 그들이 더럽히는 그 식탁이 당신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질 수 있다면, 저는 당신께서 저를 빛의 나라로 데려가시기를 기꺼이 바라실 때까지 홀로 그곳에 남아 눈물의 빵을 먹겠습니다. 제가 청하는 은혜는 오직 하나, 결코 당신 마음을 상해 드리지 않게 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언젠가는 이 어둠의 나라에서 풀려나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제 마음속 가장 은밀하고 깊은 갈망이 저를 위하여 또 다른, 더 아름다운 나라, 영원히 머무를 거처가 마련되어 있음을 확신시켜 주었기에 그렇게 믿었습니다. 저는 뛰어난 재능으로 신대륙의 발견을 예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를 둘러싼 안개가 제 영혼 깊숙이 스며들어 저를 온통 에워쌌고, 이제 저는 약속된 그 나라를 마음속에 그려 볼 수조차 없습니다. . . .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주위를 에워싼 어둠에 지친 제 마음이 내세를 생각하며 조금이나마 안식을 얻으려 할 때면, 고뇌는 더 커집니다. 어둠 속에서 믿지 않는 이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너는 빛과 향기가 가득한 나라를 꿈꾸고, 이 경이로운 것들을 만드신 창조주께서 영원히 네 것이 되시리라고 꿈꾸며, 지금 네가 시들어 가고 있는 이 안개 속에서 언젠가는 벗어나리라고 생각하지. 아니다. 죽음을 기뻐하여라. 죽음은 네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더 짙은 밤, 완전한 무의 밤을 네게 안겨 줄 테니!” . . .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제가 겪는 고통을 이렇게 묘사해 보았지만, 그것은 처음 대강 그린 윤곽이 실제 모델과 동떨어져 있듯이 현실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더 쓰다가는 하느님을 모독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 . .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 믿음이 제게 조금의 위로도 주지 않지만, 제가 믿음으로 살아가려 애쓴다는 것을 그분께서는 아십니다. 저는 지난 한 해 동안, 그 이전의 온 생애 동안보다 더 많이 믿음의 행위를 했습니다.

원수가 제게 싸움을 걸어올 때마다 저는 용감한 군인처럼 행동합니다. 결투는 비겁한 행위임을 알기에, 저는 한 번도 원수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등을 돌립니다. 그런 다음 서둘러 저의 구원자께 달려가, 천국에 대한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라면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가련한 불신자들에게 천국을 열어 주시기만 한다면, 살아 있는 동안 천국을 생각하며 누리는 모든 기쁨을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모든 위로를 앗아 가는 이 시련 속에서도 저는 여전히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로 저를 기쁘게 해 주셨습니다.”[13] 당신을 사랑하여 고통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통이 크면 클수록, 또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 않을수록, 당신께는 더 큰 영예와 영광이 됩니다. 비록 당신께서 제 고통을 눈여겨보아 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그럴 리 없음을 저는 압니다만—제 눈물로 어쩌면 믿음을 거스르는 죄 하나라도 막거나 보속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저는 여전히 기쁘게 그 고통을 견디겠습니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분명 수녀님께서는 제가 제 영혼의 밤을 다소 과장한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제가 올해 지은 시들로 판단하신다면, 믿음의 장막이 거의 걷힌 어린아이처럼 제가 위로에 흠뻑 잠겨 있었던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막이 아닙니다. 하늘 끝까지 치솟아 별이 빛나는 하늘을 가로막는 벽입니다.

천국의 행복과 하느님을 영원히 모시는 기쁨을 노래할 때에도, 저는 그 안에서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제가 믿고 싶은 것만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고백하건대, 때로는 한 줄기 햇살이 저의 어두운 밤을 비추어 잠시나마 평화를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빛을 떠올리는 일이 위로가 되기는커녕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듭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얼마나 다정하시고 자비로우신지를 이토록 깊이 느껴 본 적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무거운 십자가가 저를 낙담시킬 수도 있었을 때에는 보내지 않으시고, 제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보내 주셨습니다. 이제 이 십자가는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느낄 수 있는 자연적인 만족을 모두 앗아 갈 뿐입니다.

사랑하는 원장 어머니, 이제는 제가 위로 날아오르는 데 아무런 걸림돌도 없는 듯합니다. 죽는 날까지 그분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더 이상 아무런 바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유롭습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 곧 오랜 병으로 공동체에 짐이 되는 것조차 두렵지 않습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몸과 마음의 고통이 여러 해 동안 이어져도 저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는 오래 사는 것이 두렵지 않으며, 싸움 앞에서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딛고 서 있는 바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내 손에 싸움을, 내 손가락에 전쟁을 가르치신다. 그분은 나의 보호자이시니 나는 그분께 희망을 두었다.”[14] 저는 하느님께 젊어서 죽게 해 달라고 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되리라고 늘 생각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제가 얻으려고 애쓴 은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바람만으로도 만족하실 때가 많습니다. 제 바람이 얼마나 큰지는 어머니께서도 아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제가 무척 사랑하는 언니들을 통하여 제게 쓰디쓴 잔을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내어 주셨다는 것도 아십니다. 거룩한 다윗 임금이 이렇게 노래한 것은 옳았습니다. “보라, 형제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15] 그러나 이 땅에서 그러한 일치는 희생 가운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이 거룩한 가르멜에 온 것은 언니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타고난 애정을 절제하면서 많은 고통을 겪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는 것이 더 완전한 길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란히 싸우거나 함께 순교의 승리를 거둔 형제들을 누가 나무란 적이 있습니까? 물론 그들이 서로 격려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순교가 모두에게 순교가 된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수도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자들은 수도 생활을 순교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께 바친 마음은 타고난 애정을 조금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애정은 더욱 순수하고 영적인 것이 되면서 한층 강해집니다. 사랑하는 원장 어머니, 저는 바로 이 사랑으로 어머니와 제 언니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하늘의 임금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하여 어머니 곁에서 싸우는 것이 기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지휘관께서 바라신다는 뜻만 보이셔도 저는 다른 전장으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명령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눈길 한 번, 몸짓 하나면 충분할 것입니다.

가르멜에 들어온 뒤로 저는 줄곧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일찍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신다면, 제 운명은 노아의 비둘기와 같을 것이며, 언젠가 주님께서 방주의 창을 여시고 올리브 가지를 물고 이교의 땅으로 날아가라고 이르시리라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제가 모든 피조물 위로 날아오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르멜 안에서도 이별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저는 천국에 제 거처를 마련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낯선 백성 가운데서 유배 생활을 하는 것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쓰라린 일, 곧 제 언니들이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 것까지 받아들였습니다. 실제로 저희가 세운 사이공 가르멜에서 언니들 가운데 두 사람을 보내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한동안 두 사람을 보내는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시련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저는 그들을 붙잡으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제 그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장상들께서 그들이 떠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하셨고, 저는 그 잔의 쓴맛을 볼 만큼만 잠시 입술을 대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원장 어머니, 성모님께서 저를 낫게 해 주신다면 제가 왜 하노이의 원장 어머니들이 보내신 부름에 응답하고 싶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외국의 가르멜에서 살려면 아주 특별한 성소가 필요한 듯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이 성소가 있으며, 다만 제 건강이 걸림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언젠가 이 가르멜을 떠나게 되어 있다면, 마음의 아픔 없이 떠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 마음은 본디 여리고, 이것이 많은 고통의 원인이 되기에, 저는 이 마음이 견딜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예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어머니와 모든 수녀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이 사랑은 제게 무척이나 달콤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도 저를 알지 못하는 수도원, 유배의 쓴맛을 맛볼 수 있는 수도원을 꿈꿉니다. 제가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떠난다면 그것은 하노이 가르멜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을 위하여 저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만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에는 아주 작은 기쁨도 뜻밖의 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고통을 귀한 보물처럼 찾게 되면, 마침내 고통 자체가 모든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병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평안합니다. 저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제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자신을 온전히 예수님께 내어 맡겼으니, 그분께서는 저를 뜻하시는 대로 자유로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게 유배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그 잔을 마시는 데 동의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곧바로 그 잔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분께서는 손을 거두시며 바라시는 것은 오직 저의 동의뿐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 저의 하느님! 순명 서원으로 저희는 얼마나 많은 불안에서 벗어나는지요! 순박한 수녀는 행복합니다. 장상들의 뜻만을 유일한 길잡이로 삼는 수녀는 언제나 올바른 길을 따르고 있음을 확신하며, 장상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듯 보일 때조차 자신이 그릇된 길을 갈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나침반을 더 이상 살피지 않으면, 그 영혼은 곧바로 은총의 물이 이내 말라 버리는 메마른 황야에서 길을 잃습니다. 사랑하는 원장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저를 영원한 기슭으로 안전하게 이끌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제게 주신 나침반이십니다. 어머니께 시선을 고정하고 저의 주님 뜻을 행하는 일은 제게 더없이 감미롭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을 거스르는 이러한 유혹을 제가 겪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제 믿음의 정신을 크게 자라게 해 주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저는 주님께서 어머니의 영혼 안에 살아 계시며, 어머니를 통하여 거룩한 명령을 전해 주시는 것을 봅니다.

어머니께서 제가 순명의 짐을 가볍게 지도록 해 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저는, 어머니께서 저를 엄하게 대하시더라도 제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딸로서 품은 애정도 줄어들지 않으리라고 느낍니다. 그때에도 제 영혼의 더 큰 유익을 위하여 하느님의 뜻이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제가 받은 무수한 은총 가운데서도 사랑의 계명이 얼마나 폭넓게 미치는지를 깨닫게 된 것은 결코 작은 은총이 아닙니다. 저는 이전에는 주님의 이 말씀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과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6] 저는 무엇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힘썼고, 그분을 사랑하면서 이 다른 말씀의 숨은 뜻을 발견했습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17]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사도들에게 당신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18]는 새 계명을 주시며, 이 뜻을 제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아보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타고난 자질 때문에 사랑하신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우지 못했고 세속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벗,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당신 아버지의 나라에서 당신 곁에 있기를 바라시며, 그들을 이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기를 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9]

이 거룩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수도 공동체의 자매들에게 품고 있던 제 사랑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주님께서 자매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는 참된 사랑이란 이웃의 모든 결점을 견디어 주는 것이며, 그들의 나약함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덕행에도 감화를 받는 것임을 압니다. 무엇보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숨겨진 곳이나 함지 속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그 빛을 보게 합니다.”[20]

사랑하는 원장 어머니, 제 생각에 이 등불은 우리에게 소중한 이들뿐 아니라 집 안에 있는 모든 이를 비추고 기쁘게 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옛 율법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아직 땅에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아셨기에, 그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새 계명, 곧 “당신의 계명”[21]을 주실 때,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셨고 세상 끝 날까지 사랑하실 것처럼 그들도 사랑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 저의 예수님! 주님께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얼마나 나약하고 불완전한지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사랑하올 주님, 주님께서 제 안에서 자매들을 사랑하지 않으시면, 제가 결코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아십니다! 제게 이 은총을 베풀고자 하시기에 주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아, 저는 이 계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이 계명으로 저는 주님께서 제게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모든 이를 제 안에서 사랑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때,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께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임을 저는 압니다. 또 그분과 더욱 긴밀히 일치할수록 수녀님들을 더욱 애틋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도 압니다. 제 마음속에 이 사랑을 키우고 싶은데 악마가 어느 수녀님의 결점을 제 눈앞에 들이밀려 하면, 저는 서둘러 그 수녀님의 덕과 선한 동기를 찾습니다. 제가 그 수녀님이 한 번 넘어지는 것을 보았을지라도, 그분은 틀림없이 수없이 자신을 이겨 냈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그 승리들을 감추고 계시리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제가 잘못으로 여기는 일조차도 그 수녀님의 선한 지향 때문에 오히려 덕행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저도 같은 경험을 했기에 이를 납득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느 날 공동 휴식 시간에 문지기 수녀님이 오셔서 도와줄 수녀 한 사람을 청하셨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그 일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제가 뽑혔습니다. 그래서 하던 바느질감을 개기 시작했지만, 너무나 천천히 개는 바람에 제 옆에 있던 수녀님이 저보다 먼저 준비를 마쳤습니다. 저는 그 수녀님도 저 대신 가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도움을 청하러 오신 수녀님은 제가 느릿느릿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은 너무 느려서 왕관에 이 진주를 더하지 못하실 줄 알았어요.” 공동체의 모든 수녀님은 제가 본성적인 내키지 않는 마음에 굴복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 일로 제가 얼마나 큰 유익을 얻었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제가 다른 이들을 너그럽게 대하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칭찬을 받을 때면 이 일은 제 안에 허영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줍니다. 저의 작은 덕행이 결점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면, 제 결점이라고 해서 덕행으로 오해받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오로 성인과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인간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22]

저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언제나 다른 이들을 너그럽게 생각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분께서 저를 너그럽게 심판하시도록, 아니, 아예 심판하지 않으시도록 말입니다. 그분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23]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당신의 새 계명이 무엇인지 제게 분명히 설명해 주시는 거룩한 복음으로 돌아가,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 말씀을 읽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4]

물론 가르멜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본성적인 호불호는 있습니다. 어떤 수녀님에게는 마음이 끌리는가 하면, 또 어떤 수녀님과는 마주치지 않으려고 먼 길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수녀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제게 말씀하십니다. 그 수녀님의 행동 때문에 그분이 저를 아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25] 그리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친구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애덕이 아닙니다. 죄인들도 똑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제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달라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라.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26] 청하는 모든 이에게 주는 일은 자진해서 주는 일만큼 즐겁지는 않습니다. 상대가 상냥하게 청하면 쉽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례하게 청하면, 우리가 애덕에 완전한 사람이 아닌 한 마음속에서 반발이 일어나 거절할 구실을 끝없이 찾아냅니다. 어쩌면 먼저 그 청이 무례하다고 지적한 뒤에야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듯이 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작은 일을 해 주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그것을 두고 실랑이하느라 허비한 시간이 훨씬 더 길어집니다. 그리고 청하는 사람에게 누구나 주는 것이 어렵다면, 우리 것을 누가 가져가도 돌려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저는 이것이 어렵다고 말씀드렸지만, 어렵게 느껴진다고 말씀드리는 편이 더 옳겠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볍기”[27]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멍에를 메면 곧바로 그 편안함을 느낍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제가 제 것을 돌려 달라고 청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는 아주 쉽게 여겨져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서원한 가난을 실감하게 해 주는 기회가 생길 때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는 제가 모든 애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게 된 뒤로는, 제가 참으로 불완전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림을 그리려는데 붓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자나 주머니칼이 없어져 있으면, 저는 인내심을 잃을 것만 같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자신을 단단히 다잡아야 합니다. 물론 제게 필요한 이 물건들을 달라고 청할 수는 있습니다. 겸손하게 청한다면 우리 주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 저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손을 내미는 가난한 이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거절당해도 놀라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단순히 타고난 감정을 넘어 날아오를 때, 깊은 평화가 그 안에 넘쳐흐릅니다. 마음이 참으로 가난한 이들이 함께 누리는 기쁨에 견줄 만한 기쁨은 없습니다. 그들이 집착 없이 필요한 것을 청했는데 거절당할 뿐 아니라 이미 가진 것마저 빼앗으려는 일을 당한다면, 그들은 스승님의 이 권고를 따르는 것입니다. “누가 네 속옷을 가져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28] 제가 생각하기에 겉옷을 내어 준다는 것은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모든 이의 종으로, 노예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겉옷이 없으면 걷거나 달리기가 더 쉬워집니다.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누가 너에게 억지로 한 마일을 가자고 하거든, 그와 함께 두 마일을 더 가 주어라.”[29]

그러므로 청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만으로는 제게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상대가 바라는 것을 미리 헤아리고 기꺼이 도우려는 마음을 보여야 합니다. 또 누군가 제 것을 가져간다면, 그것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게 된 것을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때로는 어떤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으므로, 제가 언제나 복음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영혼 안에 깊이 뿌리내리면 저절로 겉으로 드러납니다. 줄 수 없는 것을 아주 다정하게 거절하여, 그 거절이 선물을 받았을 때만큼이나 상대를 기쁘게 해 주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선뜻 도와주는 이들에게는 주저 없이 청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거절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구실로 끈질기게 청하는 수녀님들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스승님께서는 “꾸려는 이를 물리치지 마라.”[3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저는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또는 그 수녀님이 나중에 보답해 주리라는 기대에서 친절을 베풀어서도 안 됩니다. 성경에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돌려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좋은 일을 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31]

참으로 그 상은 이 땅에서도 큽니다. 이 길에서는 첫걸음만이 힘겹습니다. 돌려받을 희망 없이 빌려주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차라리 아예 주어 버리고 싶어집니다. 주어 버린 것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수녀님이 자신 있게 “몇 시간만 도와주세요. 원장 어머니의 허락도 받았어요. 나중에 저도 그만큼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하고 말할 때, 이렇게 빌려준 시간을 돌려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 “저는 그 시간을 그냥 드리는 편이 낫겠어요.” 하고 말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자기애를 만족시킬 뿐 아니라, 그 수녀님에게도 제가 그 약속을 별로 믿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게 됩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우리의 타고난 성향과 어긋나므로, 은총의 도움 없이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실천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원장 어머니, 제가 평소보다도 더 두서없이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이 갈피 없는 글에서 어머니께서 무엇에 흥미를 느끼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문학적 걸작을 쓰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관한 이 이야기로 어머니를 지치게 해 드린다 해도, 적어도 어머니의 딸인 제 좋은 뜻만은 보여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품은 이상대로 살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열망만으로도 저는 평화를 느낍니다. 어떤 잘못에 떨어지더라도 저는 곧바로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제 몇 달 동안은 몸부림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거룩한 사부이신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내 집은 온전히 평화롭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내적 평화가 제 자신을 이겨 낸 한 번의 승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깁니다. 그 승리 이후, 하늘의 군대가 저를 도우러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제가 그토록 용감하게 싸웠으니, 이제 그들은 제가 상처 입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한 거룩한 수녀님은 무슨 일을 하든 저를 짜증 나게 했습니다. 여기에는 악마가 끼어들었음이 틀림없고, 제가 그 수녀님에게서 그토록 많은 못마땅한 점을 보게 한 것도 분명 악마였습니다. 저는 본능적인 반감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수녀님에게 해 드릴 법한 모든 일을 이 수녀님에게도 해 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수녀님을 만날 때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그분의 덕과 공로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주님을 매우 기쁘게 해 드린다고 느꼈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칭찬받을 때 기뻐하지 않는 예술가는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빚으시는 거룩한 예술가께서도 우리가 겉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당신께서 선택하신 내면의 성소 깊이 들어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 기뻐하십니다.

저는 제 자신을 이겨 낼 기회를 그토록 많이 주는 이 수녀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한 그 수녀님께 많은 봉사를 해 드리려고 애썼고, 쏘아붙이고 싶은 유혹이 들면 얼른 미소를 짓고 화제를 바꾸었습니다. 준주성범에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말다툼에 휩쓸리기보다는 각자가 자기 생각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더 유익하다.” 때로 유혹이 몹시 거셀 때에는, 제 내면의 싸움을 그 수녀님이 눈치채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전쟁터에서 달아나는 탈영병처럼 도망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수녀님이 환한 얼굴로 제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데레사 수녀님, 제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말해 주세요. 만날 때마다 그토록 다정한 미소로 인사해 주시니 말이에요.” 아! 제 마음을 끈 분은 그 수녀님의 영혼 깊은 곳에 숨어 계신 예수님, 더없이 쓴 것마저 달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는 방금 패배를 피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인 도망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명예로운 일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만, 수련기 동안 이 방법에 의지할 때마다 어김없이 성공했습니다. 틀림없이 어머니를 웃음 짓게 할 만한 인상적인 예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머니께서 며칠째 기관지염을 앓고 계셔서 저희는 모두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저는 제의실 담당자로서 영성체용 창살문 열쇠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러 갔습니다. 이것은 제가 맡은 일이었고, 저는 어머니를 뵐 기회가 생겨 무척 기뻤지만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조심했습니다. 한 수녀님이 몹시 염려하며 제가 어머니를 깨울까 봐 제게서 열쇠를 가져가려 했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공손하게, 저도 수녀님 못지않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열쇠를 돌려놓는 것은 제 권리라고 덧붙였습니다. 지금은 그저 양보하는 편이 더 완전한 행동이었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해 그 수녀님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녀님이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음 때문에 어머니께서 잠에서 깨신 것입니다. 모든 비난은 제게 쏟아졌습니다. 저와 말다툼을 했던 수녀님은 길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요지는 데레사 수녀가 그 소란을 모두 일으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올랐지만, 은총으로 다행스러운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변명을 시작하면 틀림없이 마음의 평화를 잃을 것이고, 부당한 비난을 받고도 아무 대꾸 없이 견디기에는 제 덕이 너무 부족하니, 무사히 벗어날 마지막 길은 도망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저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지만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 멀리 가지 못하고, 계단에 앉아 고요히 승리의 열매를 누려야 했습니다. 분명 이상한 용기이기는 하지만, 패배가 확실할 때에는 자신을 위험에 내놓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수련기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제가 완덕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깨닫게 되고, 어떤 일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납니다. 제 영혼을 훈련시키시고 날개를 달아 주신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요! 이제는 사냥꾼의 그 어떤 올가미도 저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날개 달린 것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물을 치는 것은 헛일”[32]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지금의 제 상태도 결점투성이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저를 놀라게 하지 않으며, 제가 이토록 나약하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 나약함을 자랑하고, 날마다 새로운 불완전함을 발견하리라 예상합니다. 더 나아가 고백하자면, 저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깨닫는 것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깨달음보다 제 영혼에 더 유익합니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33]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저는 구세주께서 복음 안에서 저희에게 열어 주신 이 풍요로운 광산에서 보물을 길어 올립니다. 저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을 깊이 파고들며 다윗과 함께 외칩니다. “당신께서 제 마음을 넓혀 주셨기에 저는 당신 계명의 길을 달렸습니다.”[34] 오직 사랑만이 마음을 넓힐 수 있습니다. 오, 예수님! 사랑의 감미로운 불꽃이 제 마음을 태우기에, 저는 기쁨에 넘쳐 주님의 새 계명의 길을 달리나이다. 주님의 동정녀 무리와 함께 새로운 노래, 곧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끝없는 주님 나라에서 주님을 따라다닐 그 복된 날까지, 저는 이 길을 달리고자 하나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1열왕 16:7.

[2] 토빗 12:7.

[3] 이사 3:10 참조.

[4] 잠언 9:4.

[5] 이사 66:12, 13.

[6] 시편 70[71]:17, 18 참조.

[7] 데레사 수녀는 수련장이라는 직함을 받지 않은 채 수련자들을 맡아 지도했습니다.

[8] 시편 118[119]:141.

[9] 시편 118[119]:100, 105, 106.

[10] 루카 1:49.

[11] 요한 1:5 참조.

[12] 루카 18:13 참조.

[13] 시편 91[92]:5.

[14] 시편 143[144]:1, 2.

[15] 시편 132[133]:1.

[16] 마태 22:39.

[17] 마태 7:21 참조.

[18] 요한 13:34 참조.

[19] 요한 15:12.

[20] 루카 11:33.

[21] 요한 15:12.

[22] 1코린 4:3,4.

[23] 루카 6:37.

[24] 마태 5:43, 44.

[25] 루카 6:32.

[26] 루카 6:30.

[27] 마태 11:30.

[28] 마태 5:40.

[29] 마태 5:41.

[30] 마태 5:42.

[31] 루카 6:34, 35.

[32] 잠언 1:27.

[33] 잠언 10:12.

[34] 시편 118[119]:32.


목차: 한 영혼의 이야기

목차: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 하느님의 작은 꽃이 전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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