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한가운데의 빛
연중 제3주일 가해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마태오 4:15-16
마태오 복음의 이 구절은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는 대목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이 인용된 뒤, 예수님께서는 나아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분명하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말하는 “큰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어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선포하시는 바로 이 역사적 순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공생활을 하신 이 단 한 번의 역사적 사건만을 우리에게 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어둠을 만나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비추시는 “큰 빛”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도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이 장면을 마음에 담고 잠시 머물러 보십시오. 온 땅을 완전히 뒤덮은 어둠을 상상해 보십시오. 구름이 잔뜩 낀 밤, 별과 달이 완전히 가려진 광야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아도 좋습니다. 그런 다음 구름이 갈라지고 곧바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떠오르는 해가 온 땅에 빛을 비추면서 어둠은 서서히 물러갑니다.
이는 오래전 예수님께서 오시어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 일어난 일만을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 깊이 스며들도록 할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분 자신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진리의 큰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삶에서 어둠에 덮여 있는 듯한 부분을 묵상해 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상처받고 분노하거나 혼란스러워합니까? 무엇이 다른 어떤 것보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까? 예수님께서는 삶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바로 그곳에 들어오시어 당신 영광의 빛을 비추고자 하십니다.
빛이신 저의 주님, 저에게 오시어 제 생각과 마음의 어둠 속으로 들어오소서. 오시어 오늘 제가 느끼는 슬픔과 고통을 물리쳐 주소서. 제 혼란을 밝혀 주시고, 사랑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을 밝히 깨닫게 하시어 그 혼란을 거두어 주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달아난 사람, 요나
연중 제3주일 나해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선포하여라.”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채비를 하고 니네베로 갔다. 요나 3:1-3
요나는 구약 성경의 예언자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고래에게 삼켜졌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장면은 상상력을 자극하며 어딘가 동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참 멋지고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은 요나가 왜 고래에게 삼켜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삶의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며 부르시는 말씀을 듣고도, 그는 정반대 방향으로 있는 힘껏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을 피하려고 온갖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이기셨고, 요나는 말씀을 선포하러 니네베로 갔습니다. 가장 기쁜 일은 니네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삶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선포는 결국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요나가 처음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전해진 동화 같은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없어졌을지 모르지만, 분명 요나와 다른 사람들은 큰 고초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바다의 거센 폭풍과 배에 탄 선원들의 분노, 배 밖으로 내던져지는 괴로움, 사흘 동안 고래 배 속에 갇히는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더라면 이 모든 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 또한 흥미롭고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사실 요나는 이 모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를 판단하고 손가락질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느님께서 어떤 이유로, 당신의 허용적 의지에 따라 그가 이러한 시련을 겪도록 실제로 허락하셨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처음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일도 하느님의 지혜 안에 속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며, 어쩌면 그랬을 법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요나가 우리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는 점에서, 아마도 우리를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요나의 삶이 주는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며, 우리가 당신 뜻을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부르신다는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처럼 요나의 삶과 행동은 예언적 의미를 지니며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돌아선다고 해서 곧바로 우리를 내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을 거부할수록 우리를 끝까지 찾아오시려는 그분의 뜻은 더욱 굳건해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상처와 부서진 모습, 굳세지 못한 의지, 잘못과 나약함을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영광과 완전한 계획을 위하여 쓰십니다.
오늘, 삶에서 낙심하고 있는지, 자신의 삶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실패했다고 느끼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요나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희망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결국에는 삶에서 가장 큰 짐이자 걸림돌처럼 보이는 것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바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원천이 됨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영광스러우신 저의 주님, 주님께서는 결코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결코 희망을 잃지 않으시나이다. 제가 변화하고,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저의 나약함과 부서진 모습을 쓰시어, 그 안에서 주님의 힘과 은총이 빛나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성경이라는 선물
연중 제3주일 다해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루카 1:1-4
성 루카는 이 짤막한 설명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이 머리말은 우리가 성경을 더 깊이 살펴볼 기회를 줍니다.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얼마나 자주 읽으십니까?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계십니까? 성경이 신앙생활의 토대이자 하느님을 아는 지식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선물을 통하여 당신의 완전한 사랑과 우리를 위한 완전한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알고 자주 읽으며, 그 구절들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그 안에 계시된 모든 것이 우리 삶의 토대가 되게 해야 합니다. 성경의 한 가지 특별한 측면을 묵상해 봅시다.
성경은 100% 하느님의 작품이자 100% 인간 저자의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100/100인 셈입니다. 이는 인간 저자가 성경의 각 책과 서간을 쓰면서 성령의 영감에 온전히 협력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기록된 모든 것이 당신의 마음과 영감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증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 작업은 하느님께서 신적 목적을 위하여 인간 저자를 도구로 삼으셨음을 보여 줍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첫째, 성경은 하느님의 마음과 진리뿐 아니라 인간 저자의 고유한 개성과 인간적인 면모도 드러내므로, 우리가 성경을 사랑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온전한 계시와 더불어 인간 저자의 고유한 은사에서도 도움을 얻습니다.
둘째, 하느님께서 우리를 같은 방식으로 쓰시지는 않더라도, 곧 성경에 무언가를 덧붙이도록 하시지는 않더라도, 신적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도구로 삼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의 고유한 인간적 개성을 온전히 사로잡으시고, 우리를 통하여 당신 신성의 아름다움과 광채를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찬란하게 빛나시고자, 우리와도 100/100의 협력을 바라십니다.
오늘은 두 가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먼저, 성경이라는 선물과 하느님께서 이 선물을 주시고자 인간 저자를 어떻게 쓰셨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다음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당신의 거룩한 현존을 전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 선물에 마음을 열어, 세상을 위한 하느님 말씀의 살아 있는 선물이 되십시오.
지극히 영광스러우신 영원한 말씀이시여, 성경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이 선물을 통하여 계시하신 모든 것과, 당신의 생명을 전하시고자 인간 저자를 도구로 쓰신 데 감사하나이다. 제가 언제나 당신의 거룩한 말씀에 마음을 열고, 이 세상에서 그 말씀의 살아 있는 현존이 되는 일에도 늘 마음을 열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코 3:28-29
참으로 두려운 생각입니다. 우리는 보통 죄에 관해 이야기할 때 곧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기꺼이 용서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크나큰 열망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언뜻 하느님의 자비와 정반대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죄도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용서받지 못할 특별한 죄, 곧 성령을 거스르는 죄가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 죄는 무엇일까요? 왜 용서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전통적으로 이 죄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 또는 하느님의 자비를 주제넘게 믿는 죄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누군가가 중대한 죄를 짓고도 그 죄에 대해 아무런 통회도 하지 않거나, 참으로 회개하지 않은 채 그저 하느님의 자비만 믿고 있는 경우입니다. 어느 쪽이든 이처럼 통회하지 않는 마음은 하느님의 자비에 이르는 문을 닫아 버립니다.
물론 마음이 바뀌어 죄에 대한 진실한 통회가 깊어질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곧바로 두 팔을 벌려 그 사람을 다시 맞아 주신다는 사실도 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통회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를 묵상하면서 죄에 대한 참된 뉘우침을 키워야 하는 자신의 의무도 묵상해 보십시오. 자신이 해야 할 몫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자비와 용서를 아낌없이 베푸시리라는 확신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용서받기에 너무 큰 죄는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제 죄를 인정하며 뉘우치나이다. 사랑하는 주님, 제 마음속에서 죄에 대한 통회와 당신의 자비에 대한 신뢰가 끊임없이 더욱 깊어지도록 도와주소서. 저와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완전하고 한결같은 사랑에 감사하나이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코 3:33-35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충격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던 많은 이들의 제한된 이해력을 훨씬 뛰어넘는 경우가 잦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오해를 곧바로 풀어 주려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이들을 종종 그 무지 속에 그대로 두셨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의 이 대목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군중 사이에는 아마 일순 정적이 흘렀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던 많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무례하게 대하신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정말 그러셨을까요? 성모님께서도 그렇게 받아들이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목이 강조하는 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혈연관계도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하셨기에 더욱더 예수님의 어머니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가 온전히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또한 예수님께서 일부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한다는 사실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으실 때가 많았음을 보여 줍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당신의 말씀이 어떻게 전해지고 어떻게 해야 가장 잘 받아들여지는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귀 기울이는 이들만이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아십니다. 또한 믿음 안에서 마음을 여는 이들은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거나, 적어도 그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닿을 때까지 곰곰이 되새기리라는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철학적 명제를 다루듯 논증하고 옹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을 연 이들만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완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으시며 이해하시고 기쁨에 가득 차셨으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예”라고 응답하셨기에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이해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혈연관계 때문이라기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에서 ‘어머니’라는 거룩한 칭호를 지니실 수 있었습니다. 혈연관계도 분명 매우 중요하지만, 성모님의 영적 유대는 그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오늘은 우리도 예수님의 친밀한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분의 가족이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듣고, 이해한 다음 실천하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 “예.” 하고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그 응답이 주님과 맺는 가족 관계의 토대가 되게 하십시오.
지극히 사랑하올 주님, 제가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이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게 하소서. 이러한 믿음의 행위로 당신의 거룩한 가족 안에 들어가, 당신과 맺는 유대가 더욱 깊어지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뿌리기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마르코 4:3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마침내 좋은 땅에 씨를 뿌립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그 ‘좋은 땅’처럼 되려고 힘써야 함을 보여 줍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영혼 안에 받아들이고 잘 가꾸어, 그 말씀이 풍성하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자칫 놓치기 쉬운 또 다른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좋은 비옥한 땅에 적어도 얼마의 씨앗이라도 심으려면 행동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씨앗을 넉넉히 뿌리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뿌린 씨앗 대부분이 좋은 땅에 닿지 못하더라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이 우거진 땅은 모두 씨앗이 뿌려지지만 결국 죽고 마는 곳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네 곳 가운데 씨앗이 자라나는 곳은 오직 한 곳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신 씨 뿌리는 분이시며, 그분의 말씀은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자신의 삶에서 그분 말씀의 씨앗을 뿌리며 그분을 대신하여 행동하도록 부름받았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모든 씨앗이 열매를 맺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기꺼이 씨를 뿌리시듯, 우리도 이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자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수고는 결국 눈에 보이는 열매를 거의 맺지 못하거나 전혀 맺지 못할 때가 매우 많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해져 우리가 행하는 선이나 우리가 나누는 말씀이 자라나지 못합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한 가지 교훈은 복음을 전하는 데 우리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우리는 복음을 위해 기꺼이 애쓰고 수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가 우리가 바라던 대로 나오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 사명에 “예.” 하고 응답한 뒤, 날마다 그분의 말씀을 뿌릴 길을 찾으십시오. 안타깝게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눈에 보이는 열매는 거의 없을 수 있음을 예상하십시오. 그러나 그 씨앗 가운데 일부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땅에 가닿으리라는 사실에 깊은 희망과 확신을 품으십시오. 씨 뿌리는 일에 전념하십시오.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돌보실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저의 씨 뿌리는 분이시여, 복음을 위하여 저를 당신께 내어 드리나이다. 날마다 당신을 섬기겠다고 약속드리며,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뿌리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하나이다. 제가 기울인 노력의 결과에 지나치게 마음을 쏟지 않게 하시고, 오직 당신과 당신의 거룩한 섭리에 그 결과를 맡기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할 한 가지 좋은 이유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마르코 4:24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대해 주기를 바라십니까? 어떤 대우를 받고 싶으십니까? 분명 우리 모두는 자비로운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친절과 연민, 배려와 정직 같은 태도로 우리를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위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한 가지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대하시리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저 그것이 옳은 일이기에 다른 이들에게 자비와 선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넘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기가 어렵다면, 우리가 남들에게 행하는 대로 우리도 대우받으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하나의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 마음에 일종의 “거룩한 두려움”을 심어 주고 자비롭게 행동하도록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본적인 의무를 넘어 사랑과 연민을 풍성하게 베풀고자 하는 열망으로 우리를 이끌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고, 화해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 등에 힘쓴다면, 여러분도 지금 그리고 마지막에 이러한 선물들을 풍성히 받게 되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여러분이 기대하거나 바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꺼이 쏟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아낌없이 베푸는 삶으로 받은 자신의 부르심을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너그러이 베풀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한 삶을 살기로 굳게 다짐하고,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쏟아 주실 모든 것을 기대하십시오.
끝없이 너그러우신 주님, 제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연민하는 데 철저히 너그러워지게 하소서. 용서하고 친절을 베풀며 자비를 실천하되, 이 모든 것을 풍성히 행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당신께서 제 삶에 보내 주신 이들도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아주 작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연중 제3주간 금요일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마르코 4:30-32
생각할수록 놀랍습니다. 이 작은 씨앗에는 참으로 큰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 조그마한 씨앗 안에는 가장 큰 식물로 자라나고, 먹거리를 제공하며, 하늘의 새들이 깃드는 보금자리가 될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식물이 씨앗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기에, 예수님께서 드신 이 비유가 마땅히 주어야 할 만큼의 깊은 감동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계의 이 경이로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작은 씨앗 안에 어떻게 그토록 큰 가능성이 담겨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당신 나라를 세우는 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쓰고자 하신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다른 사람들만큼 재능을 받지 못했으며, 큰 변화를 일으키지도 못하리라고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각자 안에는 하느님께서 결실을 맺게 하고자 하시는 놀라운 가능성이 가득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영광스러운 복을 베풀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뿐입니다.
씨앗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며 그분 자비의 비옥한 토양에 심기도록 해야 합니다. 날마다 기도로 물을 공급받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비추시는 빛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바라시며 세상 창조 때부터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자라나게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영혼 안에 심어 주신 놀라운 가능성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통하여 당신 나라를 이루시고, 그것도 풍성하게 이루시려는 뜻으로 여러분을 지으셨습니다. 이를 그저 믿고,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시도록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이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주님, 주님을 사랑하며 제 삶에서 이루신 모든 일에 감사드리나이다. 주님께서 여전히 제게 바라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미리 감사드리나이다. 제가 날마다 주님께 저 자신을 맡겨 드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오시어 은총으로 저를 기르시고, 제 삶에서 좋은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호수를 잠잠하게 하시다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마르코 4:38-39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이는 바다가 잠잠해진 것을 가리키지만, 우리가 살면서 때때로 겪는 혼란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에 깊은 평온을 가져다주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나 쉽게 낙담합니다. 우리 주위를 에워싼 혼란에 너무나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다른 사람의 거칠고 신랄한 말, 가정 문제, 사회 불안, 경제적 걱정 등 우리 각자를 두려움과 좌절, 우울과 불안의 덫에 빠뜨릴 만한 이유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어, 당신께서 주무시는 동안 그들이 거센 풍랑을 겪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체험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분명하고도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오직 한 가지, 곧 자신들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에만 마음을 쏟았습니다! 바다가 그들을 뒤흔들었고, 그들은 곧 닥칠 재난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깊이 잠드신 채 제자들이 당신을 깨우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깨우자, 예수님께서는 폭풍을 다스리시어 모든 것을 완전히 고요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스트레스와 어려움에 너무나 쉽게 흔들립니다.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에 압도될 때도 참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잠드신 채 우리가 깨우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언제나 그곳에 계시며, 언제나 기다리시고, 언제나 준비되어 계십니다.
주님을 깨우는 일은 풍랑이 이는 호수에서 눈을 돌려, 하느님이신 그분의 현존을 신뢰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합니다. 모든 것은 신뢰에 달려 있습니다. 온전하고 흔들림 없는 신뢰입니다. 주님을 신뢰하십니까?
오늘, 날마다 불안과 두려움이나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무엇이 이리저리 뒤흔들며 스트레스와 걱정을 안겨 주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그 짐을 바라보면서, 그곳에서 함께 계시는 예수님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우리가 신뢰하며 당신께 다가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삶에서 처하는 모든 상황을 다스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참으로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잠들어 계신 저의 주님, 삶의 어려움 속에서 주님께 향하오니, 주님을 깨워 저를 도우러 오시도록 청하고 싶나이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가까이 계시며, 제가 모든 일에서 주님을 신뢰하기를 기다리심을 아나이다. 제가 주님께 눈을 돌리고, 저를 향한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믿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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